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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부대, 한국전 당시 민간인 35명 처형"

기사입력 2006.06.2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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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발발 56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확인

     한국 전쟁 당시 전남 나주지역 경찰관들로 구성된 경찰부대(일명 나주부대)가 인민군의 진격에 밀려 퇴각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십명을 처형한 사실이 6.25 발발 56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그러나 희생자 규모가 당초 유족, 인권단체가 주장해온 것에 비해 턱없이 적은 데다 처형 이유도 신분 위장을 통한 '함정 학살'이 아닌 '작전상 불가피한 희생'으로 규정해 논란과 유족 반발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22일 나주경찰서 2층 대회의실에서 '나주부대 민간인피해 의혹사건' 현장조사 발표회를 갖고 "나주부대의 작전, 후퇴, 이동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이 35명 안팎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나주부대 사건은 한국전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영광작전'으로 불린 군ㆍ경방어작전(영광 불갑리전투)에 투입된 경찰관들이 10여대의 '스리쿼터 트럭'에 나눠 후퇴하던 중 인민군으로 위장, 퇴로인 해남 완도 진도 등지에서 수백명의 민간인에게 인명피해를 입힌 의혹을 둘러싼 미규명 사건이다.

     90년대 초반부터 지역 언론과 광주인권운동센터, 희생자 유족회, 기초의회 등을 중심으로 진상 규명 요구가 줄기차게 제기된 사건으로 학살의 실체가 국가기관에 의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희생자는 해남읍 14명과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15명(이상 1950년 7월26일), 완도선착장ㆍ중학교 1명(7월28일), 완도 노화도 4명, 소안도 1명(이상 8월20일께) 등이다.

     해남과 완도, 진도지역 중 해남읍 등 10개 읍ㆍ면은 나주부대 이동로와 일치하나 5개 읍.면에선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완도 신지도 등 4곳은 나주부대가 주둔 또는 진입하지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피해규모가 크게 줄어든 데 대해 "주민과 유족측은 14개 지역 856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나, 이는 같은 기간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사건과 여수사건, 해남 농민사건 및 공비소탕 사건 등의 사망자가 포함된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특히 인민군 위장 여부에 대해서는 완도읍과 노화도 등 2곳에서는 나주경찰 스스로가 인민군으로 가장했거나 외보로 봐 주민들이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위원회측은 "인민군이 진격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해남군을 통해 완도로 후퇴하는 과정 및 인민군과 교전하는 전시상황에서 나주부대가 자구행위로 작전상 인민군으로 위장한 것이며, 양민을 희생시키는 등 경찰직권 남용 목적으로 위장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유족측은 "인민군이 진격하기 전에 이미 경찰이 해당 지역에 인민군 복장을 한 채 진입해 환영대회를 연 것"이라며 "울며 겨자먹기로 행사에 참석했던 것일 뿐 간첩이나 공산당 동조행위는 없었다"며 경찰의 자구행위 주장을 반박했다.
     
     한편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2004년 11월 출범이후 나주부대 사건을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 민청학련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과 함께 10대 조사 과제로 선정한 뒤 지난해 9월부터 자료수집과 현장조사, 관련자 면담조사 등을 실시해왔다.

     앞서 21, 22일에는 민간인 학살현장인 해남읍 해리 우물터와 완도읍 중앙리 옛 완도중학교(현재 게이트볼장) 등을 직접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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