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들 얼차려? 브래지어 벗고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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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여군들 얼차려? 브래지어 벗고 뛰어

브래지어 벗고 구보 잠 안재우기 대표적
■ 여군들 얼차려는

  여군들에게도 얼차려가 존재한다. 방법도 다양하다. 현재 여군에 몸 담고 있는 박모 씨는 '최악의 얼차려'로 취침 박탈과 구보를 서슴지 않고 꼽는다.
  "브래지어를 벗은 뒤 구보를 합니다. 남자들이 생각할 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리겠지만 브래지어 없이 걷고 뛰고를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 가슴이 퉁퉁 부을 정도로 통증이 심합니다. 또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고역 중 하나입니다."
  군의 한 관계자는 "최근 군에서도 여군 장교가 나오는 등 여군이 부쩍 늘어났지만 훈련강도에 있어서 남자 군인과 차별을 두지 않는다"며 "일반적으로 군 훈련강도가 매우 세다고 하는데 이런 문화가 오랫동안 전통처럼 이어져오던 것이다 보니 일반 병영처럼 하루 아침에 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軍 얼차려 문화도 "바꿔 바꿔"
 
60년대 무조건 주먹질ㆍ70년대 취침 '유도점호'
80년대 팬티바람 집합ㆍ90년대 침상위 '목차렷'
2000년대 인분사건ㆍ파리물기 등 정신고통 주류

얼차려 군대문화가 바뀌고 있다. 논산훈련소에서 인분(人糞)을 찍어 먹게 한 비인간적인 얼차려가 파문을 일으키자 육군은 3일 '부드럽고' '따뜻한' 방향으로 얼차려 규정을 고쳤다. 군기를 잡기 위한 '필요악'이지만 얼차려는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게는 화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안 좋은 기억거리'다. 창군 이래 시대별 얼차려 특성을 알아본다.

▶6ㆍ25 직후인 50~60년대 군생활=당시 군생활을 경험한 인사들은 얼차려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주먹이나 발이 나가는 '폭력ㆍ구타' 행위가 횡횡했다고 설명한다. 59년 8월부터 31개월16일 동안 군복무를 했다는 소모 씨는 "기압은 없었다. 다만 잘못을 하면 정강이를 때리거나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고 말했다. 소씨는 이어 "당시 군대 문화 자체가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상부에서도 구타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유신시절, 70년대 군생활=당시에는 취침전 '유도점호'라는 게 군대 내에서 유행했다. 맨위 고참부터 시작, 모든 후임병을 한 대씩 돌아가면서 때리는 것. 속칭 '사회의 물(?)을 빼기 위한 의식'으로 5파운드짜리 곡괭이 자루가 사용됐다. 또 총을 이용하는 얼차려도 사용됐다. 70년대 초 월남파병장병 교육대에서 근무한 김모(50) 씨는 "고참이 후임병 몇 명을 황토로 된 각개전투장으로 데려가 옷을 벗게 한 후 황토밭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올라가도록 시켰다"고 설명했다.

▶군사정권, 80년대 군생활=새벽에 갑자기 집합돼 속옷 바람으로 연병장에 소집되는 '빰빠레'라는 얼차려. 고참병이 분무기나 물을 묻힌 싸리 빗자루로 후임병의 맨살에 물을 뿌려 뼈를 애는 듯한 고통을 주기도 했다. 1986년부터 89년까지 강원도 인제 소하리에서 근무했다는 허모 씨는 "일단 물방울이 닿을 수 있는 몸의 표면적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다리를 벌리고 손을 올렸다"고 기억했다.

▶민주화 바람, 90년대 군생활=90년대 군생활을 한 남성들의 상당수는 일반적인 얼차려를 받았다고 진술한다. 1.2~1.5m 너비의 침상 사이에 한쪽에는 다리를, 다른 한쪽에는 머리를 박는 얼차려도 유행했다. '팬텀기'라는 웃지 못할 얼차려도 있다. 철모에 배를 깔고 양 팔과 다리를 땅에 닿지 않게 들고 있어야 하는 것. 실제 이 얼차려를 받았던 현역 군인들은 5분을 버티기도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 외에도 '목차렷'이라는 얼차려는 침상에 누워 철모를 쓴 후 머리를 45도 정도 각도로 들고 있어야 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93년도부터 군생활을 했던 양모 씨는 "과거부터 내려오던 치약, 반합 뚜껑에 머리박기 등은 기본이었고 나머지 새로운 얼차려가 시작된 시기"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군대, 2000년대 군생활=구타 및 가혹행위에 대한 단속 강화와 함께 더욱 치밀해졌다. 상처가 드러나지 않게 목 울대를 가격해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구타 방법이 자주 사용됐다. 다른 전역자는 K1소총의 견착대를 뽑아 두 개의 철사를 최대한 늘린 뒤 콧속에 집어 넣었다며 코가 주먹만해졌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전역자는 파리를 입에 물리고 몇 번째 다리를 입으로 골라 내는 가혹행위도 있었다고 전한다. 2000년대 초에 전역한 강모(27) 씨는 "소원수리 때문에 드러내 놓고 때리지는 못했지만 지저분 하거나 잔인한 행위를 많이 시켰다"며 "아직도 쌉쌀한 파리 맛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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