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도 화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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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화술입니다

살인 피의자의 집에서 피묻은 장갑이 발견됐습니다. DNA조사 결과 99.99% 확률로 희생자의 혈흔이 분명했습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확신에 찬 어조로 추궁하자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변호인은 상식의 허점을 파고들었습니다.

남은 가능성, 즉 0.01%를 살인사건이 일어난 로스앤젤레스의 인근지역 인구 300만명에 적용하면 300명이나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자 법정 분위기는 순간 반전됐습니다. 이러한 사항은 1995년 미국사회를 들쑤셔놓은 미식축구 스타 O J 심슨 형사재판 장면이었습니다.

미국 법정은 입심의 고수들이 휘젓는 무대입니다. 상대 주장의 틈을 비집는 논리와 임기응변, 배심원의 심금을 자극하는 화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실체적 진실과 무관하게 재판에서 이기는 쪽이 선(善)이고 정의로 판가름 납니다. 화술을 매개로한 드라마 같은 법정이지요. 말을 잘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 잘하는 법 즉 화술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건 연극기법이라고들 합니다. ‘열정을 가지되 흥분하진 말고 내면적 본능에 호소하는’ 그러한 기법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언어의 현란한 구사가 상대를 압도하고 승리를 보장하는 무기로 떠오른 세상입니다.

그러나 말의 기교가 화술의 전부는 아닙니다.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위대한 연주자인지 가늠하는 기준을 묻는 질문에 “중요한 건 음정이 아니라 음정과 음정 사이의 간격”이라고 했습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뛰어난 배우나 연사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 즉 침묵을 적절히 조절해 말 이상의 효과를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침묵은 연극에서 훌륭한 대사이자 화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얼마전 노 대통령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니 효과가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가당찮아 침묵으로 일관했었을까요. 대통령 자신의 평소 언행스타일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침묵이었습니다.

말하기 곤란할 땐 침묵이상 좋은게 없지요. 옛 말에 가만 있으면 중이라도 간다는 말이 새삼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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