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선거가 농촌을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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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와 선거가 농촌을 망쳤다

역대정권 '선심' 남발…농촌 구조조정못해
올 연말 쌀협상 마감시한 앞두고 갈팡질팡

[조선일보 윤영신 기자]

한국 정부가 쌀 시장 개방 여부에 대한 최종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쌀 협상 마감시한(2004년 12월31일)에 쫓기고 있다. 올 연말까지 우리 정부에 쌀시장 전면 개방 여부를 결정하도록 과제가 주어진 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우루과이라운드(UR)에 대비해 92년 이후 62조원이라는 농업 지원자금을 쏟아부으면서도 쌀 시장 개방에 대비한 근본적인 농업 구조조정과 고(高)부가가치화라는 숙제를 차일피일 미루며 허송세월했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선거때마다 표를 의식해 쌀시장 개방 등 농업구조조정이 요구되는 현안들은 회피하면서, 경쟁적으로 선심성 공약을 남발함으로써 농업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회원국으로서 쌀 시장 개방을 요구받았으나 당시 정부는 “한국은 농업만큼은 후진국이므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사정사정해 10년의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협상 마감시한을 불과 1개월 보름 남겨둔 지금 무엇이 변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중국 등 경쟁국들의 거센 개방 압력과, 쌀 시장의 빗장을 계속 지켜달라는 농민의 목소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앓이를 하고 있는 정부의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서울대 정영일 교수(경제학)는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인기영합적 의사결정과 자원배분이 농업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농업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면서 “쌀개방 문제를 대하는 정부와 농민의 태도는 10년 전 그대로”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 농업의 경쟁력은 지난 10년간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농가소득 수준은 10년간 도시근로자 가구의 90% 수준에서 70%대로 오히려 떨어졌고 빚은 더욱 불어나 지난해 농가당 부채가 2661만원대에 달한다.

김영삼 정부는 쌀 시장 개방의 대가로 농촌에 엄청난 예산을 제공하는 등 물적 지원을 쏟아부었다. 김대중 정부때도 지방선거, 총선 등 잦은 선거 과정에서 쌀개방 문제를 덮어둔 채 농촌에 대한 물량 지원에 몰두했고, 노무현 정부 역시 부채경감과 같은 ‘당근책’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농민단체가 주최한 ‘우리쌀 지키기’ 행사에 참석해 쌀 관세화 유예(쌀개방 유예)를 약속했다. 당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도 농촌예산 확대와 같은 사탕발림식 공약을 내세웠을 뿐이다.

정부는 내년 이후 10년간 쌀 시장 개방 확대 및 FTA(자유무역협정) 등에 대비해 119조원 투·융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 혈세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의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서강대 사공용 교수(경제학)는 “역대 정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쌀값을 높게 유지하는 과보호 정책을 펴서 쌀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윤영신기자 [ ys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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