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김언희씨 세번째 시집 ‘뜻밖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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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출판] 김언희씨 세번째 시집 ‘뜻밖의 대답’

존재는 비루하다.

언젠가는 썩고 문드러지고 누런 진물 속에서 소멸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언제일까. ‘언젠가’라는 미래의 시제를 현재적 시제로 옮기면 존재의 현재는 비루하다 못해 환멸과 염증으로 가득한 한 폭의 지옥도와 같다.

세번째 시집 ‘뜻밖의 대답’(민음사)을 펴낸 시인 김언희(52)씨의 시 세계는 바로 존재들의 지옥도를 닮아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극장이라, 부르거나, 유치원이라, 부르거나 간에, 그것은 도살장이고, 도살장에 틀림없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들의,공공연한 용도를, 사무치는, 용도를, 모르는 사람, 역시, 없다, 어떤 간판을 달았든지 간에,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의 집, 안방에서, 또는 욕실에서, 가전의, 도살기구들이, 흔들거리는, 그곳에서”(‘벙커 A’중)시인의 눈에 비친 존재는 억눌려 있는 자이고 삶은 폭력과 모멸로 얼룩진 것이다.

총알이 날고 피가 튀기는 전장을 피해 벙커로 찾아들었더니 실은 도살장이라는 김언희 식 농담의 이면에는 그 도륙업자가 알고 보니 우리 자신들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에 더이상 웃을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시커먼 보자기가 펄렁펄렁/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세상이며 “어제 뉴스는 일주일 전 뉴스 일주일 전 뉴스는 작년 뉴스 작년 뉴스는 십 년 전 뉴스”인 지리멸렬하고 권태로운 반복의 되풀이일 뿐이다.

신음과 악몽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지만 침수를 막고 있는 것은 백지 한 장뿐. 시인은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시를 쓰며 용을 써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는, 쓰자마자, 시가 아니”게 된다.

시는 그저 “공포를 제거한 악몽, 악취를 제거한 배설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배설물)는 인간보다 더 거룩하다.

그에게 시는 삼키지 못할 또하나의 강박이자 똥덩어리다.

그가 쓴 한 줄 짜리 시는 바로 언어적 모독을 통해 시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비시적인 음모의 결과일 터이다.

“어쩌다가 내 개가 눈 똥이 당신 입 안에…?”(‘시’ 전문) 그는 스스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의 똥을 누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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