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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능주권역 관광산업 본격 전개된다”

기사입력 2020.03.1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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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사당ㆍ정율성 고향집ㆍ조광조 유배지ㆍ영벽정 등 관광지 즐비

    청소년들 꼭 다녀가야할 '인문학 코스' 전문가 평

    능주면 꽃단장 위해 예산 2억 마련... 인근 세계문화 유산 고인돌 유적지와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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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군은 '코로나19' 여파가 잠잠해질 4월 부터 능주권역 관광산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능주면은 주자사당ㆍ정율성 고향집ㆍ조광조 유배지ㆍ영벽정 등 관광지가 즐비한 곳이다. 특히 중국인들을 위해 주자사당이 막판 정리에 들어가고 정율성 고향집도 관광객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정암 조광조 유배지와 영벽정도 엣 선조들의 기개와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능주면 꽃단장 위해 예산 2억도 투입된다. 특히 초ㆍ중ㆍ고 청소년들이 꼭 다녀 가야할 '인문학 코스'라는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인근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와 연계하면 환상의 코스가 된다. 이들 명소들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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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사당(朱子廟)

     능주면에 소재해 있는 주자묘는 1905년 창건한 영모당을 토대로 1978년 조성돼 지난해부터 확장 공사와 주변을 깔꿈하게 정돈했다.

    신안 주씨의 시조인 청계공 주잠의 묘(墓)와 그의 증조가 되는 남송의 대학자 주자(주희 주자학 집대성)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해마다 5월 5일 제례를 지내고 있다. 주자묘 옆 동원사에는 청계공 주잠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주잠의 묘도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그의 태자리인 중국 쪽을 향하고 있다.

    주잠은 두 아들과 딸 등 7명의 학사와 함께 뱃길을 따라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남송 때이던 1224년 한림학사로 있을 때 고려로 망명 나주에 첫발을 내디딛었다. 이후 원나라의 압송 요구를 피해 영산강 샛강인 지석천을 따라 능성(능주의 옛 이름)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고려는 몽고를 상대로 항전을 하고 있었다. 현재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조가 됐다. 신안 주씨의 본관은 전남 신안이 아닌 중국 신안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자의 증손 청계 주잠(朱潛)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주자학은 조선의 뿌리를 이뤘던 성리학의 토대를 이뤘다. 고려시대 안향, 정몽주, 이색, 길재 등에 의해 계승됐다. 조선시대엔 김종직,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송시열 등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나라의 학문으로써 조선조 500년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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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혁명영웅 음악가 정율성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하고 혁명영웅으로 추앙 받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이 자란곳이다. 정율성에게 음악적 재능의 씨앗을 심어준 곳이 바로 화순 능주면이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으로 알려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했다. 항일 전사이면서 중국의 혁명 음악가로 꼽힌다.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4살 때(1917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로 이사를 했다.

    7살 때 능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며 공부했다. 

    어린 정율성은 학교 옆 신청(神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음악성과 감수성을 길렀다. 

    신청은 지금의 국공립 국악원이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의 싹을 여기서 틔웠다. 집앞 강변의 영벽정에서 낚시도 즐겼다.

    화순군은 정율성의 성장지 고향집을 복원 한·중 우호교류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앞으로 주자묘와 연계한 관광상품을 개발,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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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조광조 유배지

     조선 중종 때 급진개혁파인 정암 조광조 선생이 유배왔다가 25일만에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곳이다.

    그의 친구이자 정암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룬 양팽손(호는 학포)의 우정과 학문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나라를 뒤흔든 곧은 선비의 상징 조광조. 그러나 기득권을 거머쥔 권력의 칼날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임금에게도 할 말은 한 그가 무고를 당해 독사발을 들이키자 벼슬아치와 백성 4000여명이 구신(救伸)상소를 올렸고, 사후에는 기대승의 3차에 걸친 상소를 비롯, 노수신 이황 등이 그에게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이(李珥)는 조광조와 이황을 문묘에 모셔야 한다는 글을 두 차례 올리면서 “조광조가 도학을 창명하고 이황이 이치를 깊이 파헤쳤다”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마침내 영의정에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조 중기에 태어나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상정치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학문 태도와 현실 대결의식은 후세 선비들의 모범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이상정치는 지나치게 유교 관념에 젖어 있었다. 그는 도학을 말하고 인간 수양을 말했지만 현실문제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는 공물의 폐단을 말하고 벼슬아치의 청렴을 지적했지만, 신분제도 · 토지제도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서는 한마디 주장도 내세우지 않았다. 양반의 횡포, 지주의 수탈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너무 곧게만 일을 하려 들었고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대파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그의 정열은 길이 빛났고, 굿굿한 신념은 변절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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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향수 깃든 추억의 영벽정

     광주사람치고 영벽정 닭죽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누정보다 닭죽이 먼저였던 셈이다.

    암울하고 고달팠던 군화발시절 닭죽 한 그릇으로 애환을 달랬던 아픈 기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지만.

    화순 능주면 관영리 산1번지, 연주산 자락 지석강 상류의 영벽강 변에 위치해 있다.

    15세기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누정은 1872년(고종 9)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1873년에 능주 목사인 한치조가 중건했다. 

    1920년 군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거듭된 보수 끝에 1988년에 해체한 후 현재의 영벽정으로 재탄생했다.

    주변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까닭에 현재 화순군의 누정을 이야기할 때면 거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언급될 정도이다.

    지난해 느림보 열차인 경전선 타고 부산 갈 때 김영록 전남지사가 중학교 2년 시절 처음으로 기차타고 목포에서 능주까지 왔을 때 영벽정을 가봤노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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