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다리는 화순 능주권역관광지... 청소년 필수 인문학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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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소식

봄 기다리는 화순 능주권역관광지... 청소년 필수 인문학 코스

주자사당ㆍ정율성 고향집ㆍ조광조 유배지ㆍ영벽정ㆍ화순예술인촌 등 관광지 즐비
인근 세계문화 유산 고인돌 유적지ㆍ홍남순 변호사 생가 등과 연계
청소년들 꼭 다녀가야할 '인문학 코스' 전문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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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라디오 스타 및 MBC-TV 복면가왕 출연 등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광주 남구 거주 외국인 청년 조나단이 지난해 7월 '주자사당'을 찾아 두 팔을 벌이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화순 능주권역 관광지가 봄 기지개를 켜고 있다.

화순군은 '코로나19' 오미크론 대유행이 잠잠해질 다음달 중순 부터 능주권역 관광산업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능주면은 주자사당ㆍ정율성 고향집ㆍ조광조 유배지ㆍ영벽정ㆍ화순예술인촌ㆍ이한열 열사 출생지 등 관광지가 즐비한 곳이다. 특히 중국인들을 위해 주자사당이 막판 정리를 끝내고 정율성 고향집과 함께 중국 관광객들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정암 조광조 유배지와 영벽정도 엣 선조들의 기개와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지난해에 예산 2억을 투입 꽃단장도 마쳤다. 특히 초ㆍ중ㆍ고 청소년들이 꼭 다녀 가야할 '인문학 코스'라는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인근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 홍남순 변호사 생가 등과 연계하면 환상의 코스가 된다. 이들 명소들을 찾아가 본다. 

☞주자사당(朱子廟)

 능주면에 위치한 주자묘는 1905년 창건한 영모당을 토대로 1978년 조성돼 지난해부터 확장 공사와 주변을 깔꿈하게 정돈했다.

신안 주씨의 시조인 청계공 주잠의 묘(墓)와 그의 증조가 되는 남송의 대학자 주자(주희 주자학 집대성)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해마다 5월 5일 제례를 지내고 있다. 주자묘 옆 동원사에는 청계공 주잠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주잠의 묘도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그의 태자리인 중국 쪽을 향하고 있다.

주잠은 두 아들과 딸 등 7명의 학사와 함께 뱃길을 따라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남송 때이던 1224년 한림학사로 있을 때 고려로 망명 나주에 첫발을 내디딛었다. 이후 원나라의 압송 요구를 피해 영산강 샛강인 지석천을 따라 능성(능주의 옛 이름)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고려는 몽고를 상대로 항전을 하고 있었다. 현재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조가 됐다. 신안 주씨의 본관은 전남 신안이 아닌 중국 신안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자의 증손 청계 주잠(朱潛)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주자학은 조선의 뿌리를 이뤘던 성리학의 토대를 이뤘다. 고려시대 안향, 정몽주, 이색, 길재 등에 의해 계승됐다. 조선시대엔 김종직,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송시열 등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나라의 학문으로써 조선조 500년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중국 혁명영웅 음악가 정율성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하고 혁명영웅으로 추앙 받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이 자란곳이다. 정율성에게 음악적 재능의 씨앗을 심어준 곳이 바로 화순 능주면이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으로 알려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했다. 항일 전사이면서 중국의 혁명 음악가로 꼽힌다.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4살 때(1917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로 이사를 했다.

7살 때 능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며 공부했다. 

어린 정율성은 학교 옆 신청(神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음악성과 감수성을 길렀다. 

신청은 지금의 국공립 국악원이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의 싹을 여기서 틔웠다. 집앞 강변의 영벽정에서 낚시도 즐겼다.

화순군은 정율성의 성장지 고향집을 복원 한·중 우호교류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앞으로 주자묘와 연계한 관광상품을 개발,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할 방침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

 조선 중종 때 급진개혁파인 정암 조광조 선생이 유배왔다가 25일만에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곳이다.

그의 친구이자 정암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룬 양팽손(호는 학포)의 우정과 학문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나라를 뒤흔든 곧은 선비의 상징 조광조. 그러나 기득권을 거머쥔 권력의 칼날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임금에게도 할 말은 한 그가 무고를 당해 독사발을 들이키자 벼슬아치와 백성 4000여명이 구신(救伸)상소를 올렸고, 사후에는 기대승의 3차에 걸친 상소를 비롯, 노수신 이황 등이 그에게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이(李珥)는 조광조와 이황을 문묘에 모셔야 한다는 글을 두 차례 올리면서 “조광조가 도학을 창명하고 이황이 이치를 깊이 파헤쳤다”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마침내 영의정에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조 중기에 태어나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상정치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이상정치는 지나치게 유교 관념에 젖어 있었다. 그는 도학을 말하고 인간 수양을 말했지만 현실문제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는 공물의 폐단을 말하고 벼슬아치의 청렴을 지적했지만, 신분제도 · 토지제도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서는 한마디 주장도 내세우지 않았다. 양반의 횡포, 지주의 수탈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너무 곧게만 일을 하려 들었고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대파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그의 정열은 길이 빛났고, 굿굿한 신념은 변절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한열 열사 생가 

 조광조 선생 유배지 바로 코앞 50m 지점에 민주열사 이한열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아버지 이병섭씨와 어머니 배은심씨 사이에 누나 셋에 이어 첫 아들로 이 곳 능주면 남정리 225번지에서 태어났다. 

5살 때인 1970년 광주 동구 지산동으로 이사해 동산초교와 동성중-진흥고를 거쳐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운명의 1987년 6월 9일 민주화를 위해 시위대 맨 앞줄에 나섰지만 직선으로 날아온 최루탄이 그의 뒷머리를 때렸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7월 5일 새벽 2시 5분. 향년 22세. 나흘 뒤 운구차가 장지인 광주로 향하는 길에는 160만 국민이 함께하며 하늘도 울었다.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의 탄압에 전국민이 울면서 분노했다. 그해 6월 29일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기나긴 민주화의 투쟁이 막을 내렸다. 이후 33년이 흘렀다.

능주면이 민주화와 인권운동 투어 필수 코스로 떠오르고 있는 점은 인근에 '시대의 의인' 홍남순 변호사 생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평생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화순 출신 홍남순 변호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이 지역 민주화의 큰 어른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옛 향수 깃든 추억의 영벽정

 50대 이상 광주사람이라면 능주 영벽정 닭죽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시절엔 누정보다 닭죽이 먼저였던 셈이다.

암울하고 고달팠던 군홧발시절 닭죽 한 그릇으로 애환을 달랬던 아픈 기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지만.

화순 능주면 관영리 산1번지, 연주산 자락 지석강 상류의 영벽강 변에 위치해 있다.

15세기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누정은 1872년(고종 9)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1873년에 능주 목사인 한치조가 중건했다. 

1920년 군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거듭된 보수 끝에 1988년에 해체한 후 현재의 영벽정으로 재탄생했다.

주변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까닭에 현재 화순군의 누정을 이야기할 때면 거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언급될 정도이다.

지난해 느림보 열차인 경전선 타고 부산 갈 때 김영록 전남지사가 중학교 2년 시절 처음으로 기차타고 목포에서 능주까지 왔을 때 영벽정을 가봤노라고 말한 바 있다.

☞근원 구철우 선생 유작 상설 전시관 '화순예술인촌'

능주면 만수리 소재 옛 능주북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화순예술인촌은 이 시대 마지막 예술선비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 1904~1989) 선생 유작품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근원 구철우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나라 잃은 설움을 묵향으로 달랬으며, 6.25가 터지자 5년동안 집 콕하면서 매일 800자씩 습작 소중한 근원체를 완성했다.

‘예술은 돈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일생동안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않았고, 그의 삶에 대한 흔적을 남기는 것도 거부한 청빈한 예술가였다고 후세 예술인들은 평한다.

화순 한천 출신인 구철우 선생은 1973년 조선대학교 서예 강사로 출강하며 1975년 한국 예술원 원로 작가로 추대됐다. 1978년 연진원 원장직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88년 ‘한국 서예 100년전’에 출품했으며, 국전과 전라남도 도전 심사 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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